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모 히데오 (문단 편집) ==== 입단 과정 ==== [youtube(X67tvRkFgwE)] 1989년 [[킨테츠 버팔로즈]]의 1차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한다. 이 당시에 세웠던 ''''[[https://www.youtube.com/watch?v=oqcB-Q3_ni4|8구단 지명]]''''은 아직도 [[일본프로야구]] 드래프트 사상 최고 기록이다.[* 노모 이후에 데뷔한 [[마쓰자카 다이스케]]나 [[다르빗슈 유]]도 4개 구단의 복수 지명밖에 못 받았다. 뭐 본인들이 가고 싶은 팀을 은밀하게 밝혀둔 탓도 있었지만. 4순위 지명인 [[스즈키 이치로]]와 --조강지처가 좋더라--[[이와쿠마 히사시]]는 논외. 항상 그렇지만 1순위 지명이 훌륭한 선수가 되는 보증수표는 아니다.][* 8구단 지명 선수는 이듬해인 1990년 드래프트에서도 나오는데, 그 주인공은 코이케 히데오. 당시 세이부, 야쿠르트, 롯데, 긴테츠, 닛폰햄, 주니치, 히로시마, 한신이 1순위로 코이케를 지명했다. 이 중에서 교섭권을 가져간 구단은 롯데. 그런데, 코이케는 롯데가 교섭권을 가져간 것이 확인되자마자 드래프트장에서 '''"쇼크네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롯데의 입단을 거부하고 사회인 야구행. 코이케가 이러한 반응을 보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코이케는 드래프트 전에 이미 가고 싶은 팀(세이부, 야쿠르트, 요미우리)을 밝혔었고, 특히 롯데는 가장 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롯데 구단도 이를 알고 있어서 처음에는 코이케를 지명하지 않으려 했고 이를 코이케에게 알렸다. 그런데 당시 롯데 감독이던 [[가네다 마사이치]]가 코이케의 1지명을 강행했고, 그대로 교섭권까지 따낸 것. 코이케는 2년 간 사회인 야구에서 활동하다 1992년 드래프트 때 긴테츠의 단독 1지명을 받고 프로에 데뷔하지만, 97년 15승(파리그 다승왕) 6패 방어율 2.96을 기록한 것 외에는 특출난 성적을 기록하지 못하고 2005년 은퇴한다.] 이 때 노모를 지명하지 않은 구단은 넷.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세이부 라이온즈]]는 사이드암스로 투수인 [[시오자키 데츠야]]를, [[주니치 드래곤즈]]는 강속구 투수 [[요다 츠요시]]를[* 요다는 입단 첫해인 1990년에 최고속도 157km의 강속구를 앞세우며 31세이브를 기록하여 센트럴리그 구원 1위, 신인왕에 오르면서 노모 못지않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이후 부상을 반복하면서 급격히 성적이 하락했고, 결국 통산 8승 19패 59세이브의 기록으로 2000년 한신 타이거즈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 해설가와 기자, 라쿠텐 투수코치 등으로 활동하다가 2019년 주니치 감독으로 복귀.],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사사오카 신지]]를 일찌감치 지명하면서 노모를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돌았다.[* 시오자키와 사사오카는 각각 소속팀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로 활약했다. 특히 사사오카는 통산 100승-100세이브를 기록한 카프의 레전드로 선발에만 전념했다면 200승 가까이 올렸을 거라는게 중론.]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난 요미우리가 1차로 지명 안 하면 프로에 아예 안 가겠뜸'이라고 개드립을 친 [[오오모리 다케시]]를 지명했으나....8년간 전형적인 [[2군 본즈]]의 행보를 보여주다 1998년 [[킨테츠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되어 이듬해 은퇴.[* [[AKB48]] 팬들에게는 의외로 이 이름이 익숙하게 들릴 수 있는데 다름아닌 멤버 [[오오모리 미유]]의 아버지이기 때문. 가장 인기구단인 요미우리의 경우 1차지명이 되기만해도 꽤 언론의 주목을 받을 수 있다보니 야구에 조금 관심이 있는 30~40대에게는 오오모리 다케시의 딸이라는 것만으로도 꽤나 어필이 되었던 듯 하다. 지금도 종종 야구 관련 버라이어티 일을 맡고 있는 것도 그 인연 때문.] 이들 외에 노모에 밀려서 꿩대신 닭으로 다른 팀들이 지명한 선수들 중에는 볼 것 같으면..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는 1위 지명으로 대마신 [[사사키 카즈히로]]를 뽑았다. *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1위 지명으로 [[투수]] [[니시무라 타츠지]]를 지명했는데, 이쪽도 노모만큼은 아니지만 야쿠르트, [[킨테츠 버팔로즈|킨테츠]], [[다이에 호크스|다이에]] 등에서 선발투수로 준수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통산 75승 68패 2세이브를 기록했다. 또한 2위 지명으로 스왈로즈의 황금시대를 이끈 명포수 [[후루타 아츠야]]를 지명하게 된다. * [[오릭스 브레이브스]]는 1위 지명으로 1989년 드래프트 당시 사회인 리그 최고의 타자로 꼽히던 사토 카즈히로를 뽑았다. 하지만 이쪽은 시대착오적인 펀치파마와 특이한 언행으로 주목받을 뿐 선수로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고, 결국 데뷔 후 4년만에 은퇴하고 탤런트로 전향하여 '펀치 사토'라는 예명으로 지금까지도 활동 중이다. 그나마 2군에서 포텐은 보여준 거인의 오모리와는 다른 의미로 전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당시 오릭스는 암흑기를 걷던 한신과는 달리 세이부 등에 밀려 우승에 다다르진 못했어도 상위권에는 꾸준히 남아 있었기 때문에 팬들에게는 재미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 [[한신 타이거스]]는 1위 지명으로 암흑기 동안 선발, 구원 가리지 않고 활약한 투수 [[가사이 미노루]]를 뽑았고 하위권 지명이긴 하지만 5위로 훗날 [[메이저리그]]에서도 뛰게 되는 [[신조 츠요시]]를 지명했다. * [[닛폰햄 파이터즈]]는 1위 지명으로 당시 칸사이 대학 리그의 명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사카이 미츠지로]]를 지명했는데, 이쪽은 프로 첫해 10승을 기록했지만 이후 기대에 미치는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며 통산 23승 36패의 기록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2위 지명으로 재일교포 3세 투수 [[이와모토 츠토무]]를 지명했고, 이와모토는 선발 요원으로 그럭저럭 뛰어주면서 통산 63승 79패를 기록했다. * [[롯데 오리온즈]]는 1위 지명으로 "셰이크 볼"이란 독특한 고유 변화구를 선보인 투수 [[코미야마 사토루]]를 지명했다.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는 1위 지명으로 당시 코시엔 3회 진출 경력을 가졌고 단정한 모습으로 팬들의 인기를 끌던 고졸 유망주 [[모토키 다이스케]]를 지명했으나, 정작 본인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가고 싶다며 입단을 거부하는 바람에 지명권을 날려버렸다.[* 결국 모토키는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가는 형태로 1년간 드래프트 재수를 한 뒤 이듬해인 1990년 본인이 원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한다.] 그 뒤 3위 지명으로 [[사회인야구]]팀 프린스 호텔에서 활약하던 [[하시모토 타케히로]]를 지명했는데, 이쪽은 입단 후 제대로 입지를 잡지 못하다가 1994년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하면서부터[* 이때 맞트레이드 대상 중 한명이 다름아닌 [[아키야마 코지]]였다.] 비로소 포텐이 터지면서 중간계투로 맹활약했다. 한국 프로야구도 1년 전인 1989년 시즌에 1988 서울올림픽 대표팀 출신의 대형 신인들[* 해태의 이강철과 조계현, 삼성의 강기웅, 빙그레의 송진우, 청룡의 김기범과 노찬엽 등이 대표적.]이 활약했고, 이후 리그를 주도하는 스타로 발전한 것과 비슷한 현상. 이 당시 [[킨테츠 버팔로즈|킨테츠]]에겐 운이 꽤나 따라줬는데, 킨테츠는 그 해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했기 때문에 1순위 복수지명이 나올 시 성적에 따라 하위권 팀부터 먼저 제비를 뽑게 하는 규정상 가장 마지막에 제비를 뽑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모를 지명한 다른 구단들이 앞에서 죄다 꽝을 뽑으면서 마지막 차례인 킨테츠가 당첨 제비를 뽑고 노모를 영입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